역사와 인물들

[스크랩] 뭇솔리니 최후의 불꽃!!!, 이탈리아 사회주의 공화국 RSI(Italian Social Republic : Repubblica Sociale ItalianaI)

해 야! 2007. 3. 28. 23:02

1943년 9월 18일 17:00분, 낯익은 목소리가 저 멀리 독일의 뮌헨에서 날아온 전파가 유럽 전역으로 날아들어 고단한 하루를 마무리 하려던 연합국 국민들과 이탈리아인들을 경악시켰다.

 

부활은 예수님만 하는게 아니었다

 

“검은 여단 제군들, 그리고 이탈리아의 국민여러분들, 긴 침묵의 시간이 흐른 뒤 마침내 여러분에게 인사드립니다. 저의 목소리는 지난 고난의 순간 여러분과 함께였고 이제 우리의 애국심이 승리하는 그날까지 여러분과 함께 할 것입니다.”

 

축출된 후, 행방이 묘연했던 두체는 다시 부활한 것이다.

 

 이탈리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군기(軍旗) 가운데 엠블럼만 빼면 이탈리아 국기 트리콜로가 된다

 

이탈리아 사회주의 공화국(Italian Social Republic : Repubblica Sociale Italiana, RSI)은 뭇솔리니의 지도하에 이탈리아 북부지역에서 주권을 행사하던 임시정부였다. RSI는 수도가 위치한 가르다 호수의 작은 마을 살로(Salò)의 명칭을 따서 비공식적으로 살로 공화국이라고도 알려져있다. (독일, 불가리아, 슬로바키아, 크로아티아, 루마니아, 헝가리, 일본, 덴마크, 태국, 만주등이 RSI의 주권을 인정했으며 특이하게 스페인의 프랑코는 승인하지 않았다.)

 

 

연합군의 시실리 상륙은 두체의 모든 것을 망치게 되는데....

 

 

배    경    Historical Background

 

연합군의 시실리 상륙이후 뭇솔리니의 전쟁수행에 대한 비난 여론이 고조되어가고 있었고 특히 군부와 집권층에서 그 비난은 심화되어갔다. 하지만 뭇솔리니는 이런 비난과 자신에게 시시각각 다가오는 신변의 위협을 모른 채 7월 19일 북부 이탈리아에서 히틀러와 회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시각 로마는 불에 타올랐다. 연합국의 폭격기들은 로마를 폭격 사망자만 2,000명이 넘는 대참사가 벌어졌다.

 

신의 대리인도 끝내 로마를 지키지 못했다. 폭격직후 시민들을 위로하는 피우스 ⅩⅢ세 (Pius ⅩⅢ)

 

이제 더 이상 시간을 끌 이유는 없었다. 하원의장 디노 그란디 (Dino Grandi)의 주도와 국왕 빅토르 임마누엘 3세(Victor Emmanuel III)의 지원으로 대 파시스트 평의회(Grand Fascist Council)는 뭇솔리니를 축출하고 1943년 7월 24일 그를 구금한다. 7월 25일 엠마누엘 Ⅲ세는 뭇솔리니의 후임으로 바도글리오 (Badoglio)원수를 선임하고 바도글리오는 즉시 신정부를 구성 신정부는 연합국과 비밀교섭을 벌이면서 이탈리아의 무조건 항복을 준비하였다.

 

맘씨 좋은 할아버지의 이미지지만 전형적인 정치군인이었던 바도글리오

 

이 항복교섭은 이탈리아가 추축국에서 이탈하는 것은 물론 독일에 대한 선전포고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에 고무된 연합군은 이탈리아 접수는 쉽게 끝날 것이라는 오판을 하게 된다. 제 82공정사단이 로마에 강하되도록 계획되었다. 9월, 82공정사단의 포병을 지휘하는 맥스웰 D. 테일러 (Maxwell D. Taylor)준장이 비밀리에 로마로 강하하여 교섭에 들어갔다.

 

 휴전협상을 주도한 캡틴 테일러 준장은 로마로 강하 하는데....

 

교섭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9월 3일 마침내 테일러는 이탈리아 정부가 휴전을 결정하도록 이끌었다. 1943년 9월 8일, 제 8군이 이탈리아 남부에 상륙하는 동안 바도글리오는 정식으로 휴전을 공포했다. 바도글리오는 휴전을 발표한 후 왕과 왕족을 데리고 연합국 진영으로 피신해 버렸다. 남겨진 자신의 군대들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누굴 따라야 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지침도 내리지 않은 무책임한 도주였다.

 

한편 나찌는 이탈리아의 정치적인 격변을 인정하는 척하면서 수개의 정예부대를 이탈리아에 파견해 이 사태에 개입하려 하였다. 정예부대의 파견은 이탈리아에 상륙한 연합군을 저지하는 한편 변절이 임박할 것으로 예상되는 이탈리아에 대한 일종의 경고와 대비 성격을 띄고 있었다.

 

 (귀찮지만) 절친한 친구를 잃은 히틀러는 절치부심한다

 

1943년 7월 25일 뭇솔리니가 축출당하자 히틀러는 즉각 자신의 동료 독재자의 운명을 부정하고 독일군으로 하여금 쿠테타 세력을 제거 하려는 행동에 들어가려했지만 일단은 참아야만 했다. 그는 바도글리오와 국왕의 체포를 원했으며 뭇솔리니를 해방시키고 독일의 보호하에 파시스트 정권의 재집권을 원했다.

 

제 2공정사단의 일부 부대들이 로마로 이동되어 독일군을 강화하였다. 신정부는 이탈리아와의 동맹을 재결속하려는 히틀러의 의도에는 기꺼이 응하는 척하면서도 뭇솔리니의 행방에 대해서는 조심스럽게 모르는척 외면했다.

 

 휘하 팔슈름 야거 부대원들과 함께 한 슈튜덴트

 

한편 바도글리오 정부의 타도를 담당한 쿠르트 슈튜덴트(Kurt Student)장군은 제 11공정군단을 이탈리아에 급파한다. 동시에 저돌적인 SS 장교 오토 스코르체니(Otto Skorzeny) 대위는 뭇솔리니의 행방을 찾아내고 해방시키는 임무를 부여 받았다.

 

 유럽에서 가장 위험한 사나이에게 가장 위험한 임무가 부여되었다

 

히틀러는 갑작스럽고 극단적인 행동보다 가능하다면 코만도 슈프리모(Comando Supremo : 이탈리아 군)의 동의하에 점진적이고 동맹국(?)의 비위를 상하지 않게 독일군을 증강시킴으로써 이탈리아를 접수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아크세 작전 (Operation Achse : AXIS)

 

1943년 8월 1일 독일 국방군(OKW)은 새롭게 개정된 이탈리아 접수계획을 내 놓았다.

아크세 작전(ACHSE : AXIS)라고 명명된 이 계획은 예상되는 연합군의 이탈리아 본토 상륙과 이탈리아의 변절로 이탈리아 반도에 전개된 독일군의 위험에 대해 인식하고 있었다. 당시 이탈리아 북부에는 강력한 독일군 세력이 존재하지 않으며 투입예정인 롬멜의 지휘부는 여전히 뮌헨에 있었다. 또한 독일군은 남부와 중부 이탈리아 그리고 시실리에 8개 사단을 증강배치한 상태였으며 이 가운데 3개사단과 제 4사단의 일부 병력은 시실리에서 전투를 치르고 있었다.

 

 이탈리아의 배신은 독일의 뒷통수를 강타할 것이었다

 

 한 개 사단은 사르디니아에 배치되었고 SS여단은 코르시카섬을 점령했다. 이런 상황에서 이탈리아의 배신은 이탈리아 남부와 중부 그리고 시실리에서 전투를 치르고 있는 독일군을 고립시킬 것이라고 예측되었다.

 

 이탈리아 방어선의 총책임자 케셀링의 이마가 빛나고 있다

  

이 계획에서 케셀링의 임무는 독일군을 로마인근으로 철수시키고 이탈리아 남부지역과 사르디니아의 모든 독일군이 탈출할 때까지 로마를 확보하고 있는 것이었다.

독일은 이 과정에서 이탈리아군의 무장을 해제시키고 독일군이 철수한 지역을 적국으로 간주한다. 롬멜은 모든 알프스와 아펜니네 산맥의 통행로를 주요 북부항구들과 마찬가지로 안전하게 확보한다. 이탈리아군은 무장해제 되며 북부 이탈리아 지역은 파시스트 조직의 지원과 더불어 진정시킨다.

 

다른 부분은 발칸지역의 방어와 그 지역의 이탈리아군 무장해제에 관한 남동부 최고사령관에게 보내는 훈령이 포함되어 있었다.

 

다가올 이탈리아의 운명도 모른체 바도글리오는 이탈리아의 밀사가 시실리에서 연합군과 비밀리에 휴전협정을 조인했음에도 여전히 독일과 추축동맹에 대한 신의를 맹세하고 있었다.

 

1943년 9월 8일, 마침내 바도글리오가 항복을 공식선엄함으로써 진실이 밝혀지게 되었다. 이제 독일에게 더 이상의 인내는 필요없었다. 오래전부터 이탈리아의 배신을 인지하고 있었던 독일은 신속하게 행동에 들어갔다.

 

 아크세가 발동됐다. 이제는 재빠른 행동만이 생존을 보장한다. 독일군이나 이탈리아군이나....

 

케셀링은 연합군에 대적하고, 이탈리아 본토의 독일군을 안정시키며 이탈리아군을 무력화시켜야 하는 임무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탈리아군의 전투의지 부족과 코만도 슈프리모의 무기력한 대책은 케셀링의 임무를 가볍게 해줬다. 제 10군 지역의 모든 이탈리아군들은 밤새 사라져버렸다. (케셀링은 이 지역의 이탈리아군 5개사단 병력을 집으로 돌려보내는데 무려 이틀이나 생각하고 있었다.) 북부지역에서는 롬멜이 이탈리아군을 차례차례 무장해제 시키고 있었다.

 

 여우 이탈리아로 향하다. 북부 이탈리아군의 무장해제를 맡은 롬멜

 

전엔 필수적이었던 코만도 슈프리모나 이탈리아 정부의 동의나 양해는 전혀 고려사항이 아니었다. 독일의 이탈리아 방어는 오직 그들 자신만의 이해득실여부에 따라 진행되었다.

아무런 명령도 받지 못한 거의 대부분의 이탈리아 군대는 해산되었다. 독일군은 해산에 저항하는 그 어떤 시도도 용납지 않았으며 연합군이나 파르티잔에 가담할려는 자들 또한 용서치 않았다. 이런 시도를 한 수천명의 이탈리아 군이 사살되었으며 나머지는 독일의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다.

 

학생들에게서 불법무기를 압류한 요들 교장선생님

 

요들(Jodl) 원수가 학생작전(Operation Student)으로 압류한 이탈리아군의 장비목록은 1,255,660정의 소총, 38,883정의 기관총, 9,986문의 화포, 15,500대의 차량, 6,760마리의 노새와 말에 이FMS다. 약 60,000명의 이탈리아군이 독일의 강제수용소에 감금되었다.

 

아크세 작전은 성공했다. 휴전이후 48시간 만에 14개 독일사단은 33개의 이탈리아 사단을 무장해제 시킴으로서 이탈리아군은 해산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1943년 9월 12일, 독일 첩보기관의 수주간에 걸친 조사가 끝난 후 마침내 뭇솔리니의 행방을 파악하는데 성공했다. 곧이어 그를 구하기 위한 작전이 실행되었다.

 

 가라! 슈토르히~~무거운 두체와 스코르체니를 태우고도 기적적으로 탈출에 성공한다

 

오토 스코르체니(Otto Skorzeny)가 이끄는 독일 공정부대는 작전명 ‘아이헤’(Unternehmen Eiche or "Operation Oak")를 발동 아브루조(Abbruzzo)의 그랑사쏘(Gran Sasso)산에 감금된 뭇솔리니를 해방시키고 그를 바바리아의 라스텐부르그(Rastenburg)로 안전히 호송하는데 성공한다. 뭇솔리니는 그곳에서 자신을 영접나온 강경파 파시스트 장군들과 해후하게 된다.

 

가장 위험한 사나이는 가장 위험한 임무를 완수한다. 그리고

 

 "잘했어잉!께끗이 씯게나~~므흣♥♡♥.", "각하 이, 이러시면...." 둘은 오븟한 시간을 보낸다.

 

 

건    국    The Beginning of the R.S.I

 

 

 

지금은 휴양지로 유명한 살로 언제가 여친과 하룻밤을...

 

히틀러의 강력한 압박이 있은 후 1943년 9월 23일 뭇솔리니는 새 이탈리아 파시스트 정부의 수반역할을 맞는 것을 수락하였다. 이 후 행한 연설에서 그는 쿠테타는 실패했으며 자신은 공화국을 계승할 것이다 라고 선언하였다. 이것이 바로 R.S.I의 시작이었으며 수도는 가르다(Garda) 호수의 작은 마을 살에 정하였다. 무솔리니가 임명한 주요 각료들은 다음과 같다.

 

파시스트당 총재 - 알레사드로 파볼리니 (Alessadro Pavolini)

내무장관 - 로베르토 파리나치 (Roberto Farinacci)

국민군 사령관 - 레나토 리치 (Renato Ricci)

베를린 주재 대사 - 필리포 안푸소 (Filippo Anfuso)

국방장관 - 로돌포 그라찌아니 (Rodolfo Graziani)

 

이러한 과정을 거쳐 너무도 간단히 독일의 지원에 의존한 신생 이탈리아 국가가 탄생하게 된다.

 

그리고 미국에서 추방된 에즈라 파운드(Ezra Pound)라는 시인이 공화국의 문화와 선전에 관한 중책을 맡았다.

 

시인이며 음악가이고 비평가이며 평화주의자이고 예이츠와 절친한 친구사이이며 20세기 중반

모더니즘 시의 대가이자 열렬한 뭇솔리니의 지지자였던 에즈라 파운드 (알고보니 엄청 유명인!!!)

 

신생 공화국의 권위는 그 어떤 반대세력이라도 진압해 버림으로써 얻어지고 있었다. 1943년 11월 14일 베로나 회의에서 많은 안건들이 토의되었다. 신생공화국의 국정을 안정시키고 국가의 골격을 만드는 안건, 1943년 7월 25일 대 파시스트 평의회에서 있었던 반역자들의 처리와 파르티잔 토벌 안건등 모두 18개의 안건들이 파볼리니에 의해 서기되었고 무솔리니의 승인을 얻었다. 회의가 끝나고, 파볼리니가 구상한 반역자들에 대한 공격이 개시되어 페레라(Ferrara)에서 17명의 반 파시스트주의자들이 살해당했다.

 

잔인하게 반 공화국 세력을 탄압했던 파볼리니(가운데)는 그 댓가를 치룬다. 죽기 3일전 찍은 사진

 

내무장관 파리나치가 17명의 죽음에 대해 다음과 같은 논평을 함으로써 공화국이 내전을 피하지 않으라는 추측이 더욱 강화되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가 우리의 법이다. 사람들은 우리가 그럴 용기나 힘이 없다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사실 우리는 이대로 법을 집행할 뿐이다.’

 

심문당하는 빨치산 용의자 

 

  뭇솔리니는 수도를 정하고 국가조직을 구축하고 정비하기 위한 노력들을 하였지만 공화국은 트리에스테(Trieste), 이스트리아(Istria), 그리고 남부 티롤(Tyrol)을 독일에 양도 할 수밖에 없었다. 이탈리아 사회주위 공화국에선 그 어떤 노동조합이나 파업도 금지되었지만 인기를 얻기위해 노동자 계급의 지지를 받을수 있는 정책들이 입안되었다.

 

이미 과거의 영광은 지나가버렸지만....그의 불꽃은 계속 타오른다. 언제 꺼질지도 모른체...

 

뭇솔리니는 과거 대기업들의 이익을 위한 지원정책을 지원했던 자신의 많은 결정들을 후회한다며 지지를 호소했다. 또한 그는 만약 이탈리아 국민들이 자신에게 기꺼이 제 2의 기회를 준다면 새로운 출발을 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하지만 이제 그는 위대한 제국의 두체가 아니었다. 히틀러의 지원과 보호가 없이 무솔리니와 신생 공화국의 생존은 불가능했다. 더욱이 히틀러는 너무나 친절하게도(?) 그에게 독일인 고문관들과 무장 SS친위대 30명을 보내 두체의 국정을 조언해주며 보호해 주었다.  한 때 자신을 동경해마지 않았던 히틀러라는 꼬마친구(?)가 이제는 그의 보호자를 자처하며 이를 구실로 간섭까지 해대는 것을 그는 참지 못했다. 결국 수많은 불만과 이의제기끝에 경호문제는 무장SS와 같은 정도로 이탈리아 경호대가 같이 호위하는 것으로 결론났다.

 

나치의 파괴와 테러의 축, 무장SS의 지휘부

 

그는 이제 이해 아니 인정해야만 했다. 자신은 그저 히틀러의 꼭두각시일뿐이라것을.... 이 공화국은 독일의 입장에선 무의미하고 무능력한 꼭두각시일 뿐이었다. 그저 이탈리아의 파르티잔이나 유대인을 억압하는 용도에나 이용될 뿐 그 이상의 가치는 아직 부여받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항상 국가운용에 있어 더 많은 자율권을 요구했으나 돌아오는 것은 무시 아니면 아주 약간의 긍정뿐이었다.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꼭두각시일뿐...

 

히틀러는 이 꼭두각시에게 바도글리오를 지지한 지지자들과 파시스트당원들을 배신의 댓가를 치루도록 종용했다. 복수의 대상이 누구인지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1944년 1월 8일, 1943년 10월 13일 각료회의에 의해 승인된 재판이 개최되어 1943년 7월 25일 대 파시스트 평의회에서 뭇솔리니 축출에 찬성표를 던진 피고인들이 출석하였다.

 

 뭇솔리니의 딸과 결혼함으로써

 

뭇솔리니의 사위인 갈레아쪼 치아노(Galeazzo Ciano : 43년 10월 14일에 독일군이 이탈리아 경찰에 인도)를 비롯, 에밀리오 데 보노, 지오반니 마리넬리, 툴리오 치아네띠, 카를로 파레스치, 루치아노 고타르디등이 출석하였으며 변호인들은 당시의 투표는 자발성이 없는 행위이며 국왕의 군에대한 권위확대에 대해 표를 던진 것이며 뭇솔리니 축출의 의도는 없었다고 강변했다. 1월 10일 재판정은 치아노, 에밀리오 데 보노, 지오반니 마리네리, 카를로 파레스치, 루치아노 고타르디에게 사형을, 툴리오 치아네티에겐 30년의 실형을 선고했다.

 

 제국의 차기를 노렸었지만 

 

다음날인 1944년 1월 11일 치아노를 비롯한 사형수들은 총살당했다.

 

장인의 용서는 히틀러의 분노를 꺽지 못했다 

 

* 유태인 문제   The Jewish Question

 

1943년 여름, 40,157명의 유태인들이 이탈리아에 살고 있었으며 그 중 6,500명은 이탈리아 국적자가 아니었다. 1938년 인종차별정책을 표명한 이후 유태인을 차별하는 법안들을 통과시켰으나 그 법안들이 실질적으로는 적용되지 않고 있었다. 사실 이탈리아가 참전한지 몇 년동안, 아돌프 아이히만은 이탈리아 점령하에 프랑스, 유고슬라비아, 그리스지역의 유태인들은 추방될것이라고 발표했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탈리아의 항복후 모든 것들이 변하였다. 1943년 10월 16일, 이탈리아에서 1,259명이 독일당국에 의해 체포되었고 그 중 237명은 비유태인임이 밝혀져 석방되었으며 1,022명은 악명높은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Auschwitz-Birkenau)로 보내졌으며 839명이 열악한 노동환경과 절멸정책에 의해 사라지고 단 17명만이 살아남았다.

 

포솔리 수용소의 유태인 아이들 이들은 살아남았을까?

 

뭇솔리니는 독일당국에 의해, 이탈리아에서 벌어지는 이러한 사실들을 알고 있었다. 비록 그의 공식적인 지위는 인정받았다 하더라도 독일의 이러한 행위는 뭇솔리니 정부의 적법성을 흔드는 행위였으며 이러한 사실은 뭇솔리니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1943년 11월 5일, 이탈리아 최초의 유태인 수용소가 포솔리(Fossoli)에 건설되었고 인종청(Office of Races)을 신설하였다. 전쟁의 마지막 무렵, 이탈리아에 있던 유태인들의 삼분의 일이 절멸당하거나 감금되어 있었다.

 

 

공화국 군 Esercito Nazionale Repubblicano

                                                   (National Republican Army)

 

이 무렵 공화국의 군사력은 검은셔츠 여단(Black (Shirts) Brigades)과 온갑 잡동사니로 뒤섞인 부대 의용군들이 전부였고 이들은 독일군의 기대를 뛰어넘는 놀라운 기량을 보여줘 독일군을 실망시킨다. 그들에겐 변변한 파르티잔 토벌조차 기대할 수 없었다.

 

 검은 여단 지원 포스터 이때부터 슬슬 광기가.....

 

1943년 10월 독일은 유일하게 제대로 돌아간던 카나비니에리(Carabinieri : 헌병과 경찰의 기능을 하는 부대)의 해체를 요구했다. 이러한 독일의 명령은 이탈리아 국민들의 감정을 악화시킬 것을 알고 있던 그라찌아니는 독일의 명령서를 보여주는 대신 카라비니에리의 존재자체를 없앨 음모를 꾸몄다. 그라찌아니는, 10월 4일 카리비니에리의 지휘관 카시미로 델피니(Casimiro Delfini)중령을 불러들여 한 마디 명령을 내렸다. “9000명의 카라비니에리를 자라(Zara)로 보내시오. 그들에게 러시아군을 방어하는 임무를 맡길것이오.” 하지만, 델피니는 이를 수행할 수 없었다. 카나비리에리들은 전투요원이 아니었다. 그들은 단지 경찰임무만 수행할 수 있을 뿐이었다. 델피니의 반응은 이 하나뿐이란걸 알고 있던 그라찌아니는 카라비니에리를 MVSN(Milizia Volontaria per la Sicurezza Nazionale or National Security Volunteer Militia)나 PAI처럼 GNR(Guardia Nazionale Repubblicana)에 흡수해 버렸다.

 

42년의 카라비니에리. 이들은 경찰임무를 하는 헌병이었지 전투요원은 아니었다. 사진을 보면 알듯이 

 

국민군 사령관 레나토 리치(Renato Ricci)는 독일의 SS를 모델로 한 군사조직을 만들어 불온요소와 파르티잔을 제압하는데 사용하자고 당에 제안했다. 또한 작지만 효율적인 해군과 공군도 요구했다. 이러한 제안들은 독일 국방군에 의해 허용되어 이탈리아 반도를 방어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라찌아니는 25개 사단의 창설을 제안하였지만 독일에 의해 거부당했다. 이 제안은 심지어 리찌와 파볼리니도 비밀스럽게 반대를 했다. 25개 사단을 가진 그라찌아니는 정치적으로 너무나 많은 것을 가지게 될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라찌아니는 독일을 배반한 건 이탈리아 정부였지, 군인들이 아니었다고 항변했다.

 

여성도 포함된 파르티잔들. 공화국의 주적은 연합군보다 이들에 더 가까웠다

 

RSI가 점차 제 모습을 찾아가면서 무솔리니는 그라찌아니의 조언으로 히틀러에게 공화국군 건설에 대한 지원을 약속받는다. 그 이전부터 뭇솔리니는 독일의 포로수용소에 있는 포로들의 석방을 요구했으나 이 요구는 언제나 히틀러에 의해 거절되었으며 더 나은 대우만 보장 받았을 뿐이었다.

 

이 후 양국의 실무자간 수많은 회담이 오간 뒤인 1943년 10월 16일 라스텐부르그(the Rastenburg Protocol) 의정서가 독일과 공화국사이에 체결되어 사단급의 군사력 보유가 허용되어 로돌포 그라찌아니(Rodolfo Graziani)원수는 4개 RSI 사단 총 5,2000명의 병력을 조련할 수 있었다.

 

대갈 장군에게 장세동이 있다면 무솔리니에겐 그라찌아니가 있었다

 

10월 16일 라스텐부르그에서 서명된 조약의 초안에 따른 독일의 지원내용은 아래와 같다.

 

a) OKW는 4개의 이탈리아사단(1개사단은 알피니 사단, 3개 사단은 보병사단) 총 5,2000명을 장비시키고, 무장시키고 훈련시킨다. 병력의 대부분은 독일 포로수용소의 자원자로 충당한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독일의 이탈리아군 재건 임무는 한결 쉬워졌다. 조회해 본 결과 자원자(?)들은 최소한 3년 이상의 전장 경험으로 훈련된 자들이었던 것이다. 4개월 후인 1944년 초 첫 번째 사단이 전선으로 향하였다. 다른 사단들은 훈련을 시작했으며 연말까지는 전선에 투입할 예정이었다.

 

b) 제 9기갑사단이 독일 기갑학교가 위치한 분스도르프(Wunsdorf)에서 창설되며 완전한 독일제 전차들로 장비된다. 제 9기갑사단의 병력은 포로수용소의 이탈리아 기갑사단과 기계화 사단 출신들로 구성한다.

 

c) 공화국 최고 사령부는 30,000명 규모로 알피니 포병, 공병대와 대공포 중대들을 조직하며 이탈리아에 전개된 독일군 사단들에 양도한다. 이 부대들은 주로 해안방어와 대공방어를담당한다.

 

잠시동안(?)의 공화국 정규군 맨 오른쪽이 해병대

 

 

1943년 10월 27일 드디어 공화국군(Esercito Nazionale Repubblicano )이 창설되기에 이른다.

 

또한 이와 별도로, 의용군은 검은 여단 (Brigate Nere or Black Brigades)과 공화국 경찰 그리고 GNR(or  Republic National Guard)로 구성되었으며 총 병력은 200,000에 이르고 1943년 말에 완료되었다.

 

 히틀러의 개런드 G41M으로 무장한 Gun & Roses GNR 병사들

 

 의용군은 40개의 여단에 더하여 3개의 차량화 부대와 1개의 독립부대로 구성되었다. 주니요 보르헤세(Junio Borghese)는 1,300명의 Xa Mas 부대원들을 휘하에 두고 여전히 라 스페찌아(La Sfezia)에 주둔하고 있었으며 되니츠(Dönitz)의 승인하에 8,000명 두 개의 연대로 구성된 해군 보병(Naval Infantry)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탈리아 SS의 포스터

 

히믈러의 명령으로 독일 장군 볼프(Wolff)는 9,000명의 이탈리아 귀환 포로들로 구성된 이탈리아 무장-SS(Waffen-SS : 제 29무장SS사단)를 창설해 대 파르티잔 임무에 투입하였다. 이들은 히틀러에게 충성을 맹세했고 독일의 직접명령에 따랐다.

 

 

바도글리오의 군대    Badoglio Truffen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독일측의 이러한 약속들은 이행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명백해졌다.

 

안목이 좋았던 카이텔은 끝까지 이탈리아군을 믿지 않았다

 

OKW의 사령관, 카이텔 원수와 다른 독일 장군들은 이 이탈리아군 포로들로 구성될 이탈리아군을 믿지 못했고 이들을 신뢰할 수 없고 영 내키지 않는 바도글리오의 군대(badogliotruppen)라고 규정했다. 그래서 오직 13,100(사단 당 3,275명)의 포로만이 이탈리아로 보내졌으며 공화국은 나머지 4개 사단의 정수를 채우기 위해 징병제를 도입해야만 했다.

 

 

4개의 사단    The four Divisions

 

징병 첫 주, 공화국은 젊은 층의 뜨거운 반응에 놀랐다. 그러나 이들 중 상당수에게 지원은 단지 공화국을 벗어나기 위한 핑계였을 뿐이었으며 훈련을 위해 독일로 이동할 때 파르티잔에 가담하기 위한 거짓 지원이었다.

 

훈련장소는 OKW에 의해 강요되었고, 사단별로 분리되어 공식적으로는 잘 짜여진 훈련 시설과 대규모의 기동과 훈련을 할 수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사실 카이텔은 잘 훈련되고 장비된 4개의 이탈리아 사단을 원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케셀링 라인을 지키고 있는 독일군들 바로 뒤에 배치될 뿐만 아니라 잠재적으로 믿을 수 없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1944년 초, 무장한 경비병들의 경비를 맡으며 군용열차는 이탈리아로 떠났다. 이 열차는 공화국의 4개의 사단을 구성하기 위한 자원들을 독일도 이동시키고 여름에 다시 이들을 데리고 올것이었다.

 

뭇솔리니는, 1944년 4월과 7월 두 차례에 걸쳐 이 사단들의 훈련을 두 번씩 참관하며 격려했다.

 

 제 1 알피니 사단 몬테로사 (Monterosa) : 후에 제 4알피니

 제 2 보병사단 리토리오 (Littorio)

 제 3 해병사단 산 마르코 (San Marco)

 제 4 베르살리에리 사단 이탈리아 (Italia) : 후에 제 1베르살리에리 

 

너무나 매우 아주 심각하게 정말로 질투날 정도로 이질적이었다

 

사단의 인적구성은 매우 이질적이었다. 강경파 파시스트주의자, 구 이탈리아군의 고참병, 단지 이탈리아로 돌아가기 위해 자원한 포로 아니면 단지 19살이라는 이유로 징병된 이들, 징병을 거부하고 탈출하다 잡힌 자, 심지어는 사면 받은 파르티잔 등등 서로 섞이기 힘든 이들이 모여 있었다.

 

훈련소의 삶은 비참할 정도로 힘들었다. 믿기지 않는 육체적인 한계의 도전과 전술 훈련들, 그러나 4개 사단의 1기생들이 퇴소할 쯤엔 이들은 높은 사기와 작전능력 그리고 연합군에 맞서 능히 싸울수 있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불행하게도 이 때 독일은 더 이상 이탈리아를 믿지 않았으며 이탈리아로 돌아가 리구리아군 (Liguria Army)에 편입되었지만 연합군과의 본격적인 전투보다 대부분 대 파르티잔 작전이나 해안 방어에 배치되었다. 병사들의 사기는 급격하게 꺽였으며 작전능력은 감소되었고 곧 탈영율은 높아졌다. 50일 동안 몬테로사는 1,105명이 산 마르코는 1,400명이 탈영했다.

 

공화국군은 공화국의 수비와 대 파르티잔 토벌임무외에도 RSI군은 트리에스테, 우디네(Udine), 베니스를 목표로 침공해 들어오는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1944년 이미 정규군으로 조직된)에 대항해 북동부 전선에서 전투를 치러야 했다.

 

 사실상 내전을 벌여야 했던 고딕 라인

 

1944년-1945년 겨울동안. 무장한 이탈리아인들은 고딕라인(Gothic Line)의 양면으로 전개되어 배치되었다. 연합국은 구 이탈리아군 자원자들로 구성된 4개의 이탈리아 부대가 있었으며 추축군엔 4개의 RSI사단이 있었다. 그 중 3개의 사단 리토리오(Littorio) 보병사단, 산 마르코(San Marco)해병 사단과 몬테 로사(Monte Rosa)알피니 사단은 LXXXXVII 리구리아군에 속해 고딕라인의 프랑스 방면 측면방어를 위해 전개되었으며 나머지 1개의 사단 이탈리아(Italia)는 독일 14군에 편입되어 아펜니네(Apennine)산맥으로 배치되어 예상되는 연합군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배치되었다.

 

이 기간 RSI군의 연합군에 대한 대규모 공세는 1944년 아펜니네 산맥에서 연대규모로 이루어졌던 브라질군에 대한 공세뿐이었다. 작전은 완벽히 성공하였으며 이 성공으로 공화국군은 자신들은 능숙한 기량과 호전성을 입증했지만 이 후 별 다른 공세의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전쟁말기 슬슬 마실왔다가 갑자기 차가운 냉동 파스타를 맛봐야만 했던 브라질 제 1원정사단

 

1944년 12월 26일, 수개의 사단급 RSI 부대들이 몬테로사 사단과 산 마르코 사단에 증원되어 겨울 폭풍 작전(Operation Winter Storm)에 참가하였다. 이 작전은 미 제 92보병사단에 대한 독일군과 공화국군의 공격으로 시작되었다. 전투는 아펜니네산맥에서 벌어졌으며 제한된 규모의 이 작전은 성공적이었으며 RSI부대들은 그 역할을 다 할 수 있었다.

 

 폭풍이 휘몰아 친다. 산악전문부대 알피니의 행군

 

1945년 2월 미 제 92보병사단과 RSI는 다시 한번 전투를 치르게 된다. 베르살리에리 이탈리아 보병사단은 다시한번 성공적으로 미군의 진격을 저지해 내었다. 이 결과 RSI 국방장관 로돌프 그라찌아니는 자신이 리구리아(Liguria 이탈리아와 독일이 연합한) 군을 지휘한다고 말할정도가 되었다.

 

* 1945년 4월 30일 LXXXXVII 리구리아 군의 전투 편성

 

LXXV Corps 군단

제 5 독일 알피네(Alpine) 사단

제 3 이탈리아 리토리오 보병사단

제 34 독일 보병 사단

롬바르디아 군단

제 3 이탈리아 산마르코 해병 사단

제 134 독일 보병 여단

제 4 이탈리아 몬테 로사 알피니 사단

제 1 이탈리아 이탈리아 포병사단 (독일 14군에 편입됨)

 

1944년 7월 4일, 연합군은 로마를 해방시켰다. 구스타프(Gustav)라인은 곳곳에 구멍이 뚫린채로 허물어졌다. RSI 국민들은 마침내 전쟁이 끝나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케셀링이 설계한 구스타프 라인 (1944년 5월)

 

파르티잔에 자원하려는 자들은 급격히 늘어났으며 공화국은 더 많은 군대와 의용대를 대 파르티잔 임무에 투입할 수 밖에 없었다.

 

 

종    말    The End

 

1945년 1월, 러시아가 독일본토로 진격해 들어갔고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하지만 무솔리니는 아직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그 희망은 끈은 바로 히틀러의 비밀무기들이었으며 이 비밀무기들이 종국적으로 전쟁의 균형을 바꿀 것 이라고 생각하였지만 확신하진 못했다.

 

 

두체는 자신이 필요한 만큼의 권위와 재량을 주지않는 히틀러 때문에 낭패감을 느꼈다. 그라찌아니가 한 독일은 독자적인 군사행동력을 갖춘 이탈리아군을 믿지 못한다는 진언은 그의 속을 뒤집기에 충분했다. 뭇솔리니는 밀라노로 정부를 옮기기로 결정했다. 그곳은 연합군과의 접촉을 시도할 수 있는 곳이었고 무솔리니는 이를 시행했다. 만약 연합군이 우호적인 조건을 내걸지 않는다면 그는 발텔리나(Valtellina)에서 최후의 항전을 치러야만 했다.연합군은 무조건적인 항복이외에는 어떤 타협안도 거부해 뭇솔리니를 실망시켰으며 2000에서 5000에 이르는 병력만이 그와 함께 최후의 영웅적 항전(final heroic stand)에 나설 것이었다.

 

1944년 12월 18일, 두체는 집무실을 밀라노로 이전했다. 독일대사 란(Rahn)은 메라노(Merano)나 브레너 패스(Brenner Pass)로 옮길 것을 제안했으나 거부당했다. 밀라노를 택한 것은 독일과 멀리 떨어지기 위해서 였기 때문이었다.

 

1945년 4월 25일 경, 뭇솔리니의 공화국은 종말을 맞게된다. 이 날은 해방일(Liberation Day)이라고 알려지게 된다. 파르티잔들의 전면적인 공세와 연합군의 춘계 공세로 독일군은 이탈리아 반도에서 축출되었다.

 

잠시동안의 화려함, 그 이상으로 비참한 뭇솔리니의 최후. 모든 것은 한여름 밤의 꿈

 

 

이 날, 그라찌아니가 이탈리아의 독일군 항복이 임박했다는 급보를 알려왔다. 무솔리니 즉시 라디오방송을 통해 독일과의 동맹을 파기한다고 알리려 했으나 이미 너무 늦었다. 그 날 저녁, 뭇솔리니는 전쟁후의 전범재판에서 자신의 혐의를 부정할 서류들과 함께 서둘러 탈출했다. (이 서류들은 아직도 미스테리라고 한다.) 세밀하게 계획된 탈출임에도 불구하고 숨을 곳을 없었다. 발텔리나, 스위스로 가는 통로나 다른곳들은 아직 독일군의 수중에 있거나 영향이 미치는 곳이었다. 1945년 4월 27일, 뭇솔리니 일행은 동고(Dongo)의 무소(Musso)에서 파르티잔의 검문을 받았다.

 

 그녀의 미모가 그녀와 무솔리니를 죽였다

 

그들 중 한명이 무솔리니의 정부 페타치(Clara Petacci)를 즉시 알아봤으며 그걸로 끝이었다. 두체와 그의 정부는 즉결처분당했으며 다른 일행들은 저녁에 처형되었다. 그들 15구의 시체는 밀라노로 운구되어서 전시되었다.

 

잠시동안의 화려함, 그 이상으로 비참한 뭇솔리니의 최후. 모든 것은 한여름 밤의 꿈

 

 밀라노의 한 주유소 앞에 이 시체들은 비참한 몰골로 메달린 채 구경꾼들의 조소를 받게 되었다.

여담으로 뭇솔리니의 정부 페타치는 메달리면서 치마가 내려와 속옷이 훤히 보이는 신세로 메달렸었다고 한다. 마침 그것을 한 노파가 여자는 끝까지 자존심은 지켜야 한다며 그녀의 치마를 올려주었다고 한다. 위의 사진처럼.....

 

 이탈리아의 마지막 독일 장군 비에팅호프. 그 역시 장군에서 포로의 신세로 전락한다

 

다음날인 4월 29일, 독일 장군 하인리히 본 비에팅호프(Heinrich von Vietinghoff)이 카세르타(Caserta)에서 이탈리아 주둔 추축군의 무조건적인 항복에 서명하자 이미 북부로 후퇴한 그라찌아니도 항복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연합국에게 그라찌아니의 서명은 필요하지 않았다. 항복은 5월 2일부터 발효될 것이었으며 그라찌아니는 5월 1일 공화국의 모든 군대는 무기를 내려놓으라고 명령했다. 더불어 게릴라 활동중인 부대원들은 정규군복으로 갈아입을 것도 명령했다.

 

1945년 5월 2일 RSI는 국가로서의 생명을 다했다.이전의 2년동안 이탈리아는 파시스트주의자들과 파르티잔 그리고 공화국군과 연합에 지원한 구이탈리아군 사이에 사실상의 내전을 벌여야만 했다.

약 12,000~30,000에 이르는 파시스트주의자들이 마지막 한달동안 파르티잔에 의해 살해당했다. 구체적으로 알려지진 않았지만 그 이상의 파르티잔들이 파시스트주의자들에 의해 살해당했다고 한다. 히틀러와 뭇솔리니 두 독재자의 아집과 집착은 이탈리아에 씯을 수 없는 상처만을 안겨주었다.

 

이탈리아 사회주의 공화국은 역사에 단 1년 6개월동안 그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육군이외의 공화국의 군사력

 

공 군   Aeronautica Nazionale Repubblicana

공군은 이탈리아의 두 진영으로 나뉘였으며 북부의 이탈리아 공군은 독일 공군과 긴밀하게 협조하였다.

 

1943년 10월 에르네스토 보또(Ernesto Botto) 중령과 독일공군 원수 볼프램 폰 리히트호펜(Wolfram von Richthofen) 사이에 합의가 성사되어 쥬세페 바일런(Giuseppe Baylon)중령을 총장으로 하는 새로운 공군이 창설되었다.

 

 마키(Machi) C.205V-Veltro (Grey hound)

 

 이 새로운 공군의 명칭은 공화국 국가 공군(Republican National Air Force or ANR)이라 알려졌으며 초기 작전은 수많은 난관에 부딪쳐야만 했다. 그 이유는 독일군이 압류한 1,000여기에 가까운 공군기들을 아직 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1943년 말에 C.205V's가 다수 반환되어 드디어 Iº Gruppo Caccia가 창설되었고 1944년 3월 토리노 상공에서 데뷔하였다.

 

피아트(Fiat) G.55 센타우로(Centauro) 

 

다음으로 G.55으로 장비된 Squadriglia Complementare Montefusco와 IIº Gruppo Caccia가 1944년 4월 창설되었으며 여름에는 IIIº Gruppo Caccia가 창설되었지만 전투 가능한 상태는 아니었다.

손상된 기체들이 다반사 였으며 예비부품의 부족은 항공기 운용을 매우 어렵게 만들었다. 결국 이러한 상황들로 인하여 이탈리아 조종사들은 독일의 BF 109G에 탑승할수 있게 재교육을 받아야했다.

 

이탈리아군 마킹의 72분의 1 아카데미 모델 (찾다가 우연히 발견 ㅎㅎ) 

 

1944년 8월 독일은 ANR을 해산시키고 파일럿들은 루프트 바페에 강제 편입시키려는 시도를 했다. 그러나 조종사들은 이를 거부했고 자신들으 애기들 불태웠으며 기지는 SS부대들에 의해 포위되었다. 결국 이 위기는 독일이 자신들의 의도를 철회함 으로써 해소되었다.

북부이탈리아의 전쟁 마지막 해 북부 이탈리아에서 비행하는 유일한 추축군 항공기였다. 마키를 운용하던 Iº Gruppo Caccia는 100기 이상의 연합국 항공기를 격추했다고 주장했다. 그 어떤 Gruppo Caccia보다 많은 격추수였다.

 

해군과 Xa MAS    Regia Marina And Xa MAS

몰타부근에서 작전하던 대부분의 레지아 마리나(Regia Marina : 이탈리아 해군)가 연합군에 항복했기 때문에 RSI는 소수의 해군력만을 보유할 수 있었다. 4척의 모터 어뢰정, 2척의 대잠 초계함과 다양한 경전투함이 수상전력의 다였다. 총 10척의 잠수함을 보유했으며 5척은 북부 이탈리아의 베타솜(Betasom)을 모항으로 작전했으며 5척은 루마니아를 기지 삼아 작전했다. 베타솜의 남아있던 5척은 엔초 그로씨(Enzo Grossi)의 지휘하에 RSI의 남았다. 독일이 그의 충성을 확인하고 1943년 9월 12일 RSI깃발을 올리는 것을 허용했다.

 

 독일로부터 훈장을 수여받는 그라시

 

루마니아에 있던 5척은 추축동맹간의 미묘한 관계를 드러냈다. 1943년 11월 14일, 알베르트 토찌(Alberto Tozzi)제독은 자국의 잠수함을 루마니아의 통제에서 돌려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루마니아 정부는 RSI를 승인하고 합법적인 이탈리아 정부로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의 반환을 차일피일 미루고 방해하였다. 1944년 1월 14일 무솔리니와 안토네스쿠(Antonescu)의 회담이 이루어졌고 결국 4척이 반환되기에 이르렀다. 나머지 한척은 그동안의 유지, 정비비 명목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작전중인 이탈리아군 잠수함

 

공화국 해군은 전장에 남아있는 의미가 없었고 독일의 명령에 의해 X Flottiglia Mas (or Italian Commando Frogman 이탈리아 해군의 유인 어뢰를 운용했던 수중파괴팀. 전후 영국과 미국등이 이를 본따 유사한 조직들을 창설했으며 예)미국의 SEAL팀)만 남기고 나머지는 해군 보병으로 전환되어 보르헤세의 지휘를 받았다. (2개 연대 8,000명) 

 

 꽃미남 흑태자 에드월~드를 생각했다간 낭패. 이탈리아의 흑태자 보르헤세

 

바바리고(Barbarigo)의 기지에서 검은왕자(the Black Prince) 보르헤세(Borghese : 1970년에 쿠테타를 시도하기도 했던 과격 파시스트 주의자로서 전후 12년형을 구형받았으나 1949년 이탈리아 대법원에 의해 석방됨)가 X Mas의 지휘를 맡았으며 풀미네(Fulmine), 프레찌아(Freccia), 사기타리오(Sagittario), 루포(lupo), 발랑가 (Valanga)대대에 대한 독자적인 작전권이 부여되었다. 상당한 전과를 기록했다.

 

유인어뢰를 타고 작전을 수행중인 X mas 이 분야에서 선구자들이었다

 

이 대대들은 독일군과 연합군에 의해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그들은 여전히 독일의 점령에 불쾌해했다. 그런 요인들이 작용했는지 이들 Xa Mas대원들은 베레타 공장의 독일군 책임자들을 술에 떡을 만들어 놓고 필요한 무기를 훔쳐가기도 했고 또한 독일군과 돼지와 대포를 주고받은 거래를 통해 152mm 4개 포병중대를 만들기도 하였으며 한 중위는 독일군의 눈 앞에서 5,000리터의 연료를 슬쩍한 공로로 승진하기도 하였다.

 

 

참조 : 위키디피아 http://en.wikipedia.org/wiki/Italian_Social_Republic

         배틀프론트 http://www.battlefront.co.nz/Article.asp?ArticleID=1347

         코만도 슈프리모 http://www.comandosupremo.com/RSI.html

         기타 등등 (솔직히 기억이...ORZ)

출처 : Cigarette & Alcohol
글쓴이 : 祈遇 기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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