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

[스크랩] 영월땅의 단종릉과 청령포 ,,,,,,,,,,사진,글 펌 (편집)

해 야! 2008. 12. 7. 22:25
 
 
               조선 6대왕 단종을 모신  장릉
 
 
 
                청령포 나루터 (군에서 운행 )
 
 
 
 
 

소나기재에서 영월읍으로 들어서는 입구에 있는 장릉은 조선 제6대왕인 단종의 능이다. 단종을 현재 이곳에 모시게 된 데는 호장(아전) 엄흥도(嚴興道)의 역할이 매우 컸다.

세조에 의해 1457년 6월 노산군으로 강봉된 단종은 강원도 영월 청령포에 유배되었다. 같은 해 9월 경상도 순흥에 유배되었던 금성대군이 유(瑜)가 단종 복위를 계획하다가 발각되자 서인으로 강봉되었다.

  

단종이 영월 오던 해, 여름에 큰 홍수가 나는 바람에 단종은 청령포에서 영월 읍내의 관풍헌(觀風軒)으로 거 처를 옮겼다. 세조는 단종이 살아있는 한 계속 복위운동이 일어날까 두려워 같은 해 10월, 금부도사 왕방연에게 사약을 내려보냈다.

단종은 사약을 마시고 죽임을 당했다. 그때 단종의 나이는 17세. 단종은 세조의 명에 의해 동강에 버려졌고, 단종의 시신을 거두는 자는 삼족을 멸한다는 명이 내려졌다. 당시 세조의 서슬이 시퍼래서 죽은 단종의 시신을 거두려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영월에서 행정 업무를 보좌하는 호장 엄흥도는 아들 삼형제와 함께 죽음을 무릅쓰고 야밤을 틈타 단종의 시신을 거두어 자신의 선산인 동을지산 (지금의 장릉)에 모셨다.

이후 단종은 숙종 7년(1681)에 노산대군으로 추봉되었다가 1698년 복위되었다. 단종을 모신 능에 장릉(莊陵)이란 능호(陵號)를 부여했다.

 
 
 
 
 
 
    단종의 넋이 서려있는 ,,강건너 유배지(청령포)
 
 
 
 
궁녀들이 기거하며 노산군(단종)을 보필하던 곳.
 
 
노산군이 기거한 곳
 
 

 
 
    단종의 거처 연離所가 소실되어 영조 39년에
    단종의 어소위치를 표시한 비석
 
 
 
 
 
 
 관음송

청령포수림지에 위치하고 있는 소나무로 단종 유배시의 설화를 간직하고 있다.
1988년 천연기념물 제349호로 지정되어 있다.
단종 遺址碑閣(유지비각)서편에서있다. 단종이 유배생활을 할 때는 두 갈래로 갈라진 이 소나무에 걸터앉아 쉬었다는 전설이 있다.
 
또한 단종의 유배 당시 모습을 보았으며(觀), 때로는 오열하는 소리를 들었다(音)는 뜻에서 관음송(觀音松)이라 불리어 왔다.
수령은 600년으로 보고 있는데, 이는 단종 유배시의 수령을 80년으로 하여 계산된 것이다.

청령포는 남한강 상류에 3면이 강으로 둘러싸인 섬과 같은 곳으로 주변에는 우거진소나무의 숲이 있고, 관음송은 그 소나무 숲 중앙에 자리잡고 있다.
 
 
 
 
노산대(이곳에서 한양을 보고 ,,,,,,)
 
 
 
 
망향탑과 노산대
 


 숲 입구에 서있는 금표비
 
이 비석에는 "東西三百尺 南北四百九十尺 此後泥生亦在當禁"
(동서삼백척 남북사백구십척차후니생역재당금)이라 기록되어 있다. 강봉된 노산군이 이 청령포에서 동서로는 삼백 척을, 남북으로는 사백 구십 척을 벗어날 수 없다는, 이른바 행동 반경을 제한하는 금지령 팻말인 것이다.
 
 
 
청령포는그옛날 어린단종이 외로움과 무서움속에
살 던 흔적이 남았을 뿐  ,,,



 영월의 호장 엄흥도

조선 제6대 단종대왕이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강원도 영월에 유배되었을 때 충의공은 이 고장 호장직(戶長職)에 있었다.
밤낮으로 대왕의 거소(居所) 청령포를 바라보고 대왕이 무사하기를 기원하던 중 어느날 달 밝은 고요한 밤에 청령포 대왕의 거소에서 슬프고 애끊는 비명의 곡성이 들려오므로 황급히 강을 건너가 진배하니 대왕은 울음을 멈추고 “이 심야엔 웬 사람이 나를 찾는가?” 하고 물으니, “소신은 이 고장 영월호장 엄흥도이옵니다”라고 대답하고 옥안을 바라보니
 
대왕은 “육지고도(陸地孤島)인 이곳 청령포에 유배된 이후 밤마다 꿈속에서 신하들을 보고 추억을 회상하며 탄식하고 지내던 중 비조불입인 이곳에서 너를 보니 육신을 상봉한 것 같구나. 그대는 실로 초야에 묻힌 선인이로구나!”하고 반갑게 맞이 하였다.

그후 호장 엄홍도는 매일 밤 풍우를 가리지 않고 문안을 드렸으며 그해 여름 큰 장마로 인하여 대왕은 청령포 어소에서 영월읍 영흥리 관풍헌에 침소를 옮기게 되어 밤마다 객사 동편에 있는 자규루(子規樓)에 올라 자규시르 읊으면서 지내던 중 금부도사 왕방연(王邦衍)이 가지고 온 사약을 받고 승하하니,
 
 
그 옥체는 동강물에 던져지고 시녀는 동강절벽(후일에 낙화암이라고 함)에서 투신절사(投身節死)하였는데 이 때가 매우 추운 겨울이었다.
엄흥도는 단종이 관풍헌에서 사약을 받고 승하하자 단종의 시신을 거둔 이로 유명하다. 단종이 서거하자 세조의 명에 의해 단종의 시신은 동강에 버려졌다.세조는 단종의 시신을 거두는 이는 삼족을 멸한다고 엄명했기 때문에 아무도 단종의 시신을 거두지 못했다.

호장 엄흥도는 군수에게 성장(聖裝)을 청하였으나 세조를 두려워하므로 성사치 못하자 즉시 서강과 동강이 합류하는 곳으로 달려가 죽음을 무릎 쓰고 아들 삼형제와 함께 밤에 단종의 시신을 몰래 거두어 달려가 그곳에서 대기하였다가 옥체를 인양하여 미리 준비한 관에 봉안하고 운구하여 영월군 서북쪽 동을지산(冬乙支山)지금의 장릉에 암장하고 자취를 감추었다.

1759년 (영조 34년) 그 벼슬을 공조판서로 추봉하여 사육신 정렬에 배향하고 육신사(六臣祠)에 봉안·치제케 했다. 그후 1516년 (중종 11년)에 어명으로 노산묘를 찾아 수축하고 능전사청을 후인

1791년 (정조 15년)에 어명으로 노산료를 찾아 수축하고 능전사청을 건립 1791년 (정조 15년)에 어명으로 장릉배식단(莊陵配食壇 )에 배합향배(配合享배)케 하고 정려치제(旌閭致祭)케 하였으며, 1833년(순조 33년) 공조판서에 추증되고 고종 13년(1876)에 충의공 시호를 내렸다. 묘소는 영월읍 팔괴리 창평산 186번지에 있다.

 
 


관풍헌 자규루
단종이 청령포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중 그해에 큰 홍수가 나는 바람에 이곳으로 거쳐를 옮겼다. 이곳에서 단종은
1457년 10월 24일 세조가 내린 사약을 받고 한 많은 짧은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사약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나 한편으로는
(강요에 의해)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子規詞(자규사)단종(1441-1457)

月白夜蜀魄 (월백야촉백추)
달밝은 밤에 두견새 울음소리 더욱 구슬퍼
 
含愁情依樓頭(함수정의루두)
수심많은 이내 목 누 머리에 의지하노라
 
爾주悲我聞苦(아주비아문고)
슬피우는 네 목소리 내 듣기 괴로우니
 
無爾聲無我愁(무이성무아수)
네 울음 그쳐야 내 수심도 그치리라
 
寄語世上苦勞人(기어세상고로인)
세상에 괴로움 많은 자에게 한마디 부치니
 
愼莫登春三月子規樓(신막등춘삼월자규루)
아예 춘삼월에는 자규루에 오르지 말아다오
 
 
 
 
 
 
 


▲ 창절사
창절사는 단종 복위운동을 벌이다 세조에게 죽은 사육신 박팽년, 성삼문, 이개, 유성원, 하위지, 유응부 6위(位)와 생육신 가운데 김시습, 남효온 2위, 박심문, 엄흥도 충신 2위를 합쳐 10위의 위패를 봉안한 곳이다.
 
 
 
 
영월여행..
 
 
 동강의 비경
 
 
 
 
 임거정이 기거했다는 동강의 정각루
 
 
 
 
동강은 여름철 래프팅 명소. 그러고보면 예나 지금이나 동강엔 뗏목이 떠다니는 셈이다. 100여년 전엔 떼꾼들을 실은 뗏목이 가파른 급류를 헤치고 나아갔고, 급류 덕에 래프팅이 발달했지만, 급류는 떼꾼들에겐
 ‘무덤’이었다. 어라연 입구 ‘된꼬까리 여울’은 ‘되게 고꾸라진다’는 뜻에서 붙은 이름이다.
어라연 입구에서 어라연까지 왕복 3시간30분 코스.
 
 
한반도지형 선암마을
 
 
                                     영월 고씨동굴
 
            
 영월읍에서 영월 화력발전소 쪽으로 11Km 거리에 위치해 있는 고씨동굴은 총길이가 6.3km  에 이르는 종유석 동굴이다.
 
동굴 내부에는 약 4억년전부터 형성된 종유석과 4개의 호수,
 3개의 폭포 및 6개의 광장이 있으며, 모양이 다른  종유석과 석순, 돌기둥의 배열과 조화가 극치를 이루고 있으며, 천연기념물 제219호로 지정되어 있다. . 

 
 
출처 : 지윤이 플래닛입니다.
글쓴이 : 지윤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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