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인물들

정지용의 향수 ,,,펌

해 야! 2009. 3. 6. 12:01

 

 

 

 

 

 

1. 시 [향수]의 감흥

성악가 박인수 교수가 노래하는 정지용의 [향수]를 들어보면, 이 시의

언어가 구현하고 있는 조형적인 아름다움이 그 특이한 음색을 통해

절절하게 흘러넘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한때는 월북시인이라는 이름으로 접근조차 금지되었던 그의 시가 이제는

 절창의 노래로 널리 불려지고 있으니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향수]라는 시는 물론 정지용의 시 세계를 대표하는 작품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정지용이 지향하였던 시의 방법과 정신에  비추어 본다면 이 시는

 그의 다른 작품들과는 분명히 다른 특징을 지닌다.

 

 

 

       

            향수       

                                    정지용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즐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傳說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이 시는 시적 언어 자체가 압축과 긴장을 살려내기 보다는 지나치게

서술적이고 설명적이다.

 고향의 옛모습을 회상적으로 제시하기 위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시상의 전개 자체도 특별한 공간적인 구상을 염두에 둔 것 같지 않다.

자연스럽게 연상되는 여러 가지 생각들을 얽어놓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에서 유별나게 드러나는 것은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라는 후렴구이다.

이 같은 반복적인 후렴구를 쓴 경우는 다른 작품에서 거의 찾아보기

어렵지만, 이 후렴구가 없다면 시의 묘미를 살리기 어려울 것같다.

 고향에 대한 사무친 그리움이 직접적으로 토로(吐露)되고 있기 때문이다.





2. 정지용의 시 세계



정지용(鄭芝溶)의 본격적인 시작 활동은 1926년 잡지 {학조}에 시

{카페 프랑스}를 발표하면서 이루어졌다.

  한국 현대시문학사에서 언어에 대한 자각을 각별하게 드러낸 시인으로

평가되고 있는 그의 시들은 두 권의 시집 {정지용시집}(1935)과

{백록담}(1941)으로 집약되고 있다. 그는 자기 감정의 분출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1920년대의 서정시와는 달리, 시적 대상에 대한 다양한

감각적 경험을 선명한 심상과  절제된 언어로 포착해내는 새로운 인식의

시를 썼다.

 이 같은 시창작의 방법은 시적 언어에 대한 그의 남다른 관심과 자각에

 의해 가능했던 것이다.

  

 
정지용은 거의 일관되게 시적 대상으로서의 자연을 노래하고 있다. 30년대

중반에 그가 빠져들어 있던 종교적인 구도의 세계를 제외할 경우 특히 그렇다.

 그는 가톨릭 신앙을 바탕으로 잡지 {가톨릭 청년}에 수많은 종교시를 발표한

  바 있다. 어떤 연구자들은 종교적인 시들을 제외한 초기의 시와

후기의 시를 각각 감각적인 시와 동양적인 시라는 서로 다른 차원의 세계로

 구분하기도 하지만, 그가 초기의 시에서부터 시집 {백록담}의 경우에

이르기까지 시를 통해 발견한 것은 자연 그 자체였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물론 정지용 이전에도 시를 통해 자연을 노래한 경우는 허다하게 

많은 것이 사실이다.

 

 

여기서 시를 통한 자연의 발견이라는 명제를 유달리 정지용의

시에서만 문제삼는 것은 시적 대상으로서의 자연을 노래하는 방법이 그

이전의 서정시와는 본질적으로 차이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시는 자연을 통해 자신의 주관적인 정서와 감정의 세계를 토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면서  자연에 대한 자신의

 감각적인 인식 그 자체를 언어를 통해 새롭게 질서화하고 있다.

이 새로운 시법은 모더니즘이라는 커다란 문학적 조류 안에서 설명되기도

 하고 이미지즘이라는 이름으로 규정되기도 한다.

  


정지용이 보여주고 있는 새로운 시법으로서 가장 중요시되어야 하는 것은

예리하고도 섬세한 언어적 감각이라고 할 수 있다.

시의 언어에 대한 자각은 물론 그 이전의 김소월이나 동시대의 김영랑의

경우에도 그 중요성이 인정된다. 이들은 모두 시를 통해 전통적인 정서에

알맞은 율조의 언어를 재창조하였기 때문이다. 정지용의 경우 이들과는 달리

율조의 언어에 매달린 것이 아니라, 언어의 조형성(造型性)에 대한  탐구에

관심을 집중한다.

 

 

 

그는 시의 언어를 통해 음악적인 가락의 미를 창조한 것이

아니라 공간적인 조형의 미를 창조한다. 이 같은 특징은 언어의 감각성을

최대한 살려내고자 하는 시인의 노력에 의해 가능해지는 것이다.

 정지용은 생활 속에서 감각의 즉물성과 체험의 진실성에 가장 잘 부합될 수

 있는 일상어를 그대로 시의 언어로 채용한다. 그러므로 정지용의 시에는

상태와 동작을 동시에 드러내는 형용동사들이 많이 쓰이며 상태와 동작을

한정하는 고유어로 된 부사들을 자주 활용하여 사물의 상태와 움직임을

예리하게 포착하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특징은 {정지용시집}에 수록되어

있는 '바다'를 소재로 한 연작시에서 가장 잘 드러나고 있다.

 

 


"바다는 뿔뿔이/달아나려고 했다.//푸른 도마뱀떼같이/재재발랐다.

//꼬리가 이루/잡히지 않았다.//

흰 발톱에 찢긴/산호보다 붉고 슬픈 생치기!//가까스로 몰아다 붙이고/

변죽을 둘러 손질하여 물기를 씻었다."(바다 9)에서와 같이 정지용이

노래하고 있는 바다는 시인 자신의 내면적인 감정의 세계와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여기서의 묘사라는 말은 물론 언어적인 압축과 긴장을

수반하는 시적인 묘사를 일컫는다. 시적 이미지의 구축을 위해 동원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앞의 시에서 전체적인 시적 텍스트를 구성하고 있는

 각각의 연들은 모두가 이미지의 덩어리들이다.

  

 

시적 대상으로서의 '바다'가 시인의 재기발랄한 심상을 통해 새롭게

공간적으로 구성되어 나타난다.

이때 느끼게 되는 감각적 선명성은 모두 일상적인 언어의 시적 변용을

통해 가능해진 것이다. 이 같은 즉물적인 언어적 감각은 그의 {백록담}의

 시들에서 더욱 고조된 긴장을 수반한 채 정밀성(靜謐性)을 더하고 있다.
정지용이 그의 시에서 활용하고 있는 또하나의 시법은 주관적 감정의

절제와 정서의 균제(均齊)라고 할 수 있다.

이 같은 방법은 정지용과 함께 시문학파라는 문단적인 유파로 분류되었던

다른 어떤 시인도 감당해내지 못한 방법이다.

 

 

그는 개인적이고도  감정적인 것들을 철저하게 배제하면서

 사물과 현상을 순수관념으로 포착하여 이것을 시를 통해 표현하고자 한다.

 이러한 시적 표현은 사물의 언어와 교신하는 그의 특이한

언어 감각과 기왕의 고정된 감각을 모두 해체시켜 새롭게 재구성하고자

하는 그의 시적 욕구를 기반으로 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어린 딸을 잃은 슬픔을 노래한 것으로 알려진 [유리창]과 같은 작품을 보면,

이 같은 감정의 절제된 표현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유리창]에서는 어둠으로 표상되는 무한의 세계와 대면하는 경계선에

유리창이 가로막고 있다.유리창에 입을 대고  입김을 불어보는 시인은

 지금 이곳의 세계와 저기 어둠 속의 세계를 상상력의 힘으로 서로 연결한다.

 창 밖 어둠 속에 빛나는 별빛을 보는 순간 자신의 슬픔과 열망 같은 것은 모두

소멸되는 것이다.
정지용의 시에서 절제된 감정과 언어의 균제미(均齊美)는 시집 {백록담}

에 이르러 거의절정에 이른다. [장수산]이나 [백록담]과

 같은 작품에서는 시적 심상 자체가 일체의 동적인 요소를 배제한다.

 

 

그리고 명징한 언어적 심상으로 하나의 고요한 새로운 시공을 창조해낸다.

이러한 시적 방법에서 우리는 정지용이 체득하고 있는

은일(隱逸)의 정신을 보게 된다. 자연의 역동성을 거부하고 있는 정지용의

 태도가 지나치게 소극적인 세계인식이라고 폄하할 사람도 없지 않을

것이지만,우리 시가 도달하고 있는 정신적인 성숙의 경지를정지용이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3.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의 의미

다시 앞에 인용한 시 [향수]로 돌아가 보자. 이 시의 첫 연에 "얼룩백이

황소가/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여기서

 '얼룩백이 황소'를 젖소처럼 검고 흰 모습을 연상할 사람은 없으리라고 본다.

이 구절의 내용을 바르게 이해하기 어렵게 만드는 것은 '해설피'라는 말이다.

이 말은 이희승 편 {국어대사전}에도 등재되어 있지 않으며, 한글학회편

 {우리말 큰사전}에도 나와 있지 않다.

 

최근에 김재홍 교수가 펴낸 {시어사전}에 바로 이 단어가 그대로 인용되어

있다. 그리고 그 뜻을 "해가 질 무렵"이라고 적어 놓고 있다. 정확한 근거를

밝혀 두지는 않았으나 이 시어를 시간 표시의 부사어로 보고 있는 셈이다.

유종호 교수가 이 시를 해설한 글에도 비슷한 의미를 적어놓고 있다. 그런데

이와는 달리 정의적(情意的)인 부사어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 모양이다.

'구슬프게'라든지 '별 뜻 없이' 등의 의미로 보는 경우이다.


 

'해설피'라는 말은 '해가 질 무렵'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충청도 지방에서 이와 비슷하게 쓰이는 말이 있다. 저녁 무렵에 외출을

하려고 한다든지, 밭이나 논에서 어떤 일을 새로 시작하려고 하면,

"해설핏한데 어디 가느냐?" 또는 "해설핏한데 내일 하지."

라고 말한다. 이 경우에 '해설핏하다'는 말은 '해+설핏하다'로 보아야 한다.

'설핏하다'는 말은 대부분의 사전에 등재되어 있다.

 

 

{국어대사전}에는 '해가 져 밝은 빛이 약하다.'로 설명되어 있다.

이렇게 보면, '해설피'는 '해가 설핏하다'는 말을 놓고 정지용이 새로이

만들어낸 조어일 가능성도 있고, 이 같은 합성어가 실제로 쓰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해설피'의 의미를 시간적인 부사어로 보면, 다음에 연결되어 있는

'황금빛'이라는 말이 바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쉽게 연상된다. 해질

무렵의 저녁 노을 속에서 황소가 길게 울음을 우는 모습을 떠올릴 수

있는 것이다.
정지용의 다른 시 작품 가운데 '설핏하다'는 시어를 사용한 사례가 하나 있다.

 다음 시의 마지막 연에 나오는 '산그림자도 설핏하면'이라는 구절이다.

해가 지기 시작하여 산그림자가 어둑해지는 순간을 묘사한 부분이다.

이 시구를 함께 보면 '해설피'의 근원을 헤아리는 데에 도움이 될 듯싶다.

 

 

 

 

국립  국어연구원편 <새국어생활> 2000년 봄호에서 인용 (정문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