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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임당 ,,,,,,,,,펌

해 야! 2009. 4. 17. 12:27

[뉴스 쏙]
혼인 뒤 19년 친정살이·남편 꾸짖는 당찬 여성
조선후기 노론 유학자들 ‘현모양처 전형’ 몰아
한겨레 김진철 기자
? 이당 김은호 화백이 그린 신사임당.

 
 
 
 
 
 
 
 
 

 

 

 

만들어진 현모양처, 신사임당

신사임당(1504~1551)에 관한 가장 기초적인 사료는 셋째 아들 율곡 이이가 쓴 ‘나의 어머니 일대기’(선비행장)이다. 부친 이원수의 행장을 쓰지 않은 이이가 모친의 행장을 쓴 것은 그만큼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이의 글을 보면 많은 의문이 생긴다. 아들이 그린 신사임당의 실제 모습은 현모양처와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신사임당이 중종 17년(1522) 이원수와 혼인한 곳이 외가의 외가인 강릉이란 사실부터가 심상치 않다. 게다가 사임당은 혼인 3년 후에야 시어머니 홍씨를 처음 만났다. 혼인 직후 세상을 떠난 부친 신명화의 삼년상을 치르고 나서야 상경했던 것이다.

 

 


이 무렵 조선은 혼인 방식을 중국식 친영례(親迎禮)로 바꾸려는 왕실·사대부들과 오랜 혼인 전통을 유지하려는 민간 풍습이 충돌하며 진통을 겪고 있었다. ‘장가(장인집)간다’는 말처럼 신부의 집에서 식을 치르고 상당 기간 머물러 사는 것이 전통 혼례 풍습이었다. 반면 왕실·사대부들은 신부집에는 인사만 하고 당일 본가로 돌아오는 친영례로 바꾸려 했다. 세종 17년(1435) 파평군 윤평이 태종의 서녀 숙신옹주와 혼인할 때 최초로 친영례를 실시했다고 <세종실록>은 전하고 있다. 사임당 혼인 무렵의 임금인 중종이 재위 10년(1515) “혼인은 만세(萬世)의 시작인데 남자가 여자의 집으로 가는 것은 천도에 역행하는 것이니 어찌 옳겠는가?”라고 비판한 것은 혼인 방식을 둘러싼 갈등이 계속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위의 압박이 심해지면서 중국식 친영례로 바꾸는 사대부가가 늘어났지만 사임당과 그 부모는 전통 혼례 방식을 고집한 것이다.

 

 

 

이이가 신사임당이 서울 시댁에 정착한 때라고 전하는 중종 36년(1541)은 혼인 19년 후였다. 서울에 정착한 이유도 “시어머니 홍씨가 이미 늙어 가사를 돌볼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시어머니가 가사를 돌볼 수 있었다면 사임당은 서울로 올라오지 않았을 것이다. 사임당의 모친인 이씨도 혼인 후 16년 동안이나 친정에서 따로 살았다. 상경 후에도 사임당은 “자나깨나 꿈속에도 돌아가고파”란 유명한 시구대로 친정을 그리워했다.

 

 

 

이이가 ‘나의 어머니 일대기’에서 “아버지께서 혹시 실수하는 일이 있으시면 반드시 옳은 도리로 간하셨다”고 적은 것처럼 신사임당은 여필종부보다는 때로는 남편도 꾸짖는 여인이었다. 신사임당의 꾸짖음은 이원수가 윤원형과 함께 사림을 탄압한 이기와 어울리는 것에 대한 훈계로 해석된다. 이 때문에 이원수는 이기와 발길을 끊었다지만, 그가 종5품 수운판관에 임명된 명종 5년(1550)에 이기는 영의정이었다는 점에서 의문이 있다. 이이가 부친의 행장은 쓰지 않은 이유도 이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다.

신사임당은 서울에 올라온 지 10년 만인 1551년 마흔여덟에 세상을 떠났다. 이이는 사임당이 “어려서부터 경전에 통달했고 문장에 능했다”고 썼지만 글은 전해지지 않고 그림만 전한다. 이이는 “어머니의 그림을 모사한 병풍이나 족자가 세상에 많이 전해지고 있다”고 예술가 신사임당을 회상했다.

 

 

 

 

사임당은 어떻게 현모양처가 되었나?

신사임당에 대한 거의 유일한 1차 사료인 ‘나의 어머니 일대기’에서 현모양처로 그리지 않은 신사임당은 어떻게 현모양처의 전형이 되었을까? 이이의 제자인 사계 김장생이 편찬한 <율곡연보>는 이이가 다섯 살 때 사임당이 아프자 몰래 외할아버지 사당에 들어가 기도했다고 적었다. 외가 강릉에서 나고 자란 이이가 강한 외가 종속성을 갖고 있었음을 시사하는 기록이다.

이후 김장생의 제자인 우암 송시열이 ‘사임당이 그린 난초에 발하다’라는 글에서 신사임당 모자를 “상곡군 집안만이 앞에서 홀로 빛나게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라고 비교하면서 현모양처의 이미지가 시작되는 것으로 보인다. 상곡군은 성리학의 집대성자인 송나라 정호를 뜻하는데, 그 모친 후씨가 정호 형제를 배출한 것이 신사임당과 같다는 발상이다. 중국과 조선의 성리학자 모자를 나란히 높여 성리학을 조선의 유일사상으로 만들려는 의도가 끼여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송시열의 제자인 노론 계열 유학자들이 다수 사임당 예찬에 가담했다. 김창협의 문인 신정하는 신사임당의 <초충도>를 보고 “그린 분은 석담(이이)의 모부인인데 나는 선생과 모부인을 존경한다”라고 썼고, 송상기는 “선생은 백세의 스승이다. 세상에 그 스승을 섬기면서 그 스승의 모친께 불경한 자가 어찌 있겠는가?”라고 이이와 사임당을 동일시했다. 물론 이이의 글을 통해 사임당이 현모양처와는 거리가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나 눈을 감았다.

신사임당은 이렇게 조선 후기의 집권당 노론에 의해 현모양처의 전형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혼인 19년 후에야 시댁에 정착한 데 대한 설명이 필요했다. 노산 이은상은 1960년대에 쓴 <사임당 편>에서 ‘남편을 큰 인물로 만들기 위해 10년 뒤에 다시 만나기로 약속했기 때문’이라고 강릉 지방 전설을 인용해 합리화했다. 물론 사임당을 현모양처로 만들기 위해 후대에 창작된 전설이다.

 

 

 

신사임당이 화폐 인물로 선정된 이유에 대한 궁금증이 여전하다. 현모양처의 전형으로 선정했다면 실제 사실과 맞지 않다. 또 아들이 화폐 인물인데 모친까지 선정해야 할 정도로 한국사에 인물이 없느냐는 의문도 생긴다. 여성예술가로서 선정했다면 그럴듯하지만 허난설헌·황진이 등 다른 예술가들은 왜 탈락했는지 설명이 필요하다. 현대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자아실현형 여성은 없는가란 의문도 생긴다. 여성 화폐 인물 선정이란 시대의 목소리에 부응하는 듯한 겉모습 뒤에 현모양처라는 전통 여성상에 이 시대의 여성을 묶어두려는 속의 잣대가 작용한 결과가 아니길 바라면서 이 문제에 대한 공론의 장이 다시 열리기를 기대한다.

이덕일/사학자

 

 

 


? 논란이 끊이지 않는 오만원권 화폐 인물 신사임당 초상화.